[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들을 줄 모르는 자는 믿음을 관념으로 바꾼다”


“어리석은 길은 부패로 이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0월 17일 화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전례 독서의 내용을 두고 역설했던 가르침이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두 번에 걸쳐 ‘어리석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율법 학자들에게, 그리고 일부 바리사이들에게 사용하셨고(루카 11,37-41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16-25).” 교황은 세 번째 경우도 덧붙였다. 곧,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인들에게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했던 부분이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갈라 3,1) 그 결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이념에 홀리도록 자신을 방치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했던 이 말씀은 하나의 선고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교황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했다. “하나의 선고라기보다, 부패로 이끄는 어리석은 길을 보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의 신호등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 교황은 “어리석은 세 그룹”이 “부패했다고” 말했다. 먼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7)라고 말씀하셨던 자들이다. 두 번째로 이방인들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던” 이유로 “바보가 된 자들”이라고 고발한 이들이다. 결국 이 경우에도, 앞서 인용했던 율법 학자들처럼 “부패했다.” “속이 아니라 오로지 겉만 강조하기 때문에 썩게 되었습니다. 허영, 외관, 외적 아름다움, 외적인 정의로움에 의해 부패했습니다. 오로지 사물의 겉만 깨끗이 닦고 아름답게 꾸미려고 신경을 쓰지만, 정작 썩어빠진 속에는 손이 가지 않기 때문에 부패하게 됐습니다. 무덤 속과 같습니다.” 이어 교황은 대구법을 사용해 계속 비교했다. “이 이방인들은 이성을 통해 알 수 있었던 하느님의 영광을 우상들과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곧, 우상숭배, 수많은 우상들의 숭배로 인한 부패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해 교황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고대 시대의 우상숭배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상숭배도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소비주의의 우상숭배, 편리한 하느님을 찾는 우상숭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경우는 바오로 사도가 똑같이 어리석다고 말했던 갈라티아인들이다. “그들은 관념론에 따라 부패됐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관념론자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세 가지 범주 모두” “이 어리석음 때문에 부패로 끝난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론이다.

바로 여기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묻고, 자문해보도록 권한다. “이 어리석음은 무엇입니까?” 교황의 첫 번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듣지 않는 것입니다. 라틴어 ‘Nescio’, 글자 그대로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청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말씀을 들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지 못할 때는,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그 말씀이 들어오도록 놓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듣지 않습니다. 그는 듣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듣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 말만 합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사랑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아니면, 충분히 일반적인 경우처럼, 말씀이 “만일 내 안에 들어온다면, 스며든다면, 현실에 대한 내 생각에 의해 변화” 된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논리를 이어간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들은 들을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귀먹음이 그들을 부패로 이끕니다. 하느님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사랑을 위한 자리도 없으며, 마지막엔 자유를 위한 자리도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 관해 “사도 바오로는 그들은 종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들을 숭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듣지 않는 자는, 이 귀먹음이 사랑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자유에도 자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노예상태로 이끌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스스로 자문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교황은 제안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놓아둡니까? 알렐루야를 부르면서 들었던 이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느낌을 분별합니다. (쌍날칼처럼) 마음을 찢고, 속으로 들어옵니다. 나는 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지, 혹은 이 말씀을 들을 귀를 막아버립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그럴싸한 겉모양으로 교체합니까, 아니면 우상숭배나 우상숭배적인 습관으로 바꾸어버립니까, 혹은 그 말씀을 관념으로 바꾸어버립니까? 그러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교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권고했다. 다시 말해 “성인들의 성화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것처럼, 오늘날의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황은 “어리석은 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확신했다.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어리석은 사목자들도 있습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자들을 강력하게,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사목자의 어리석음이든, 이방인처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목자의 어리석음이든, 관념론자인 사목자의 어리석음이든, 목자들의 어리석음은 양떼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교황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이 어리석음 바로 곁에서 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주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사실 이런 주님의 모습은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은 주님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예레 2,2). 우리와 가졌던 첫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향수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리석음에 빠지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분은 그리워하십니다. 우리를 그리워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그리움으로 눈물 흘리셨습니다. 그건 예루살렘을 두고 슬피 우셨습니다. 그분께서 선택하셨고, 사랑하셨지만, 어리석음 때문에 멀어져 갔던 백성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겉모습, 우상 또는 우상숭배를 선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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